2010/12/29 12:48
[분류없음]
돈이 필요했다. '굶어죽으란 법은 없다'고 말하듯 전화벨이 울렸다. S식당의 사장이었다. 술한잔 하자며 식당으로 놀러오라고 했다.
몇 달 전 홀서빙할 사람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S식당을 찾아갔었다. 며칠 트레이닝을 받았으나 불어가 짧아서 고용할 수가 없다며 사장은 나를 돌려보냈었다. 그는 연거푸 소맥잔을 건네며 거듭 미안하다고 했고 정말로 미안해보였다. 꼭 다시 연락을 주겠다했고 정말 다시 연락을 해왔다. 사장은 좋은 사람이며 파리의 다른 한인업체 사장들보다 훨씬 덜 나쁜 사장이다.
그는 파리 16구, 서울로 치자면 삼청동에 해당하는 부자동네에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다. 파리 외곽의 방 두개짜리 집에서 부인,아들과 한방을 쓰고 다른 방에 민박을 치는 것으로 민박 사업을 시작한 그는 십년 후 파리 16구에 객실 아홉개짜리 고급 민박집 그리고 샹젤리제 거리에 단 하나 존재하는 한식당의 소유주가 되었다. 말하자면 그는 파리 한인사회에서 레전드에 해당하는 인물인 것이다.
민박집에서 모든 노동을 도맡아하던 조선족 아주머니께서 파리생활 5년 반 만에 처음으로 고향에 두 달 동안 다녀오시게 되었는데 내가 혹시 그 땜빵을 해줄 수 있겠냐고 사장은 물었다. 할 수 있겠다 했고 며칠 후 바로 짐싸서 민박집으로 들어갔다. 숙식이 제공된다는 말은 즉 하루종일 그곳에 붙어 있어야만 하는 일자리라는 뜻이었다. 아주머니가 떠나는 날까지 일주일 동안 나는 그녀한테 트레이닝을 받았다.
민박집에서의 하루는 이렇게 구성된다. 아침 여섯시에 일어나 아침밥 준비. 일곱시 반부터 아침밥 먹이기. 설거지 끝내고 청소와 빨래 및 장보기. 저녁 여섯시부터 저녁준비. 일곱시 반부터 저녁밥 먹이기. 설거지 끝내고 취침. 그 사이사이에 투숙객이 인근 지하철 역에 도착하면 민박집으로 데려오는 일과 체크인 체크아웃을 해야한다. 매 끼니 밥과 국과 메인디쉬 하나 그리고 밑반찬 다섯가지를 낸다. 김치가 떨어지면 김치를 담그는 일도 물론 내 몫이다. 아홉개의 객실 중 일곱개는 차있으며 투숙객들은 평균 13명 정도로 보면 되겠다. 젊은 여행객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민박집보다 투숙비가 훨씬 센 관계로 투숙객은 주로 파리에 출장오는 사람들이었다.

민박집. 그곳은 한국이었다.
두달 동안 전라도 출신의 투숙객은 단 한명이었다. 투숙객들 중엔 내게 '겪어봐서 하는 말인데 전라도 것들은 믿어선 안된다'거나 '파리에도 껌둥이들이 많네요'혹은 '쪽바리와 짱깨들만 보면 재수가 없다' 따위의 말을 건내는 분들이 종종 계셨고, 가끔 '백인들이 보기엔 우리의 피부도 그리 하얗지는 않겠죠' 혹은 '여기서 본 경상도 사람들은 죄다 인종주의자던데 그 이유는 뭘까요' 아니면 '그 짱깨들이 글을 만들어서 읽고 쓸적에 우린 동굴에서 마늘과 쑥을 먹는 곰이었죠' 따위의 대답을 하면 숙연한 분위기가 조성되곤 했다.
명품 브랜드 로고가 박힌 쇼핑백들이 쓰레기의 가장 큰 부분을 이루었다. 쇼핑여행온 2,30대의 여성들은 명품사려면 쁘렝땅 백화점이 좋냐 갤러리 라파예트가 좋냐 따위의 질문을 했고, 출장온 4,50대 남자 투숙객들은 한국식 룸싸롱은 어디에 있냐 혹은 백마를 타봐야겠는데 어느 동네 물이 제일 좋냐는 따위의 질문을 했다. 대부분의 투숙객들은 고추장, 김치, 라면을 갖고 왔으며 또 그 대부분은 체크인한 그날 밤에 라면을 끓여드셨다.
어제 밤에 파리에 온 분들, 그러니까 아직 프랑스 음식을 안 드셔본 분들이 오늘 아침을 먹으며 한국사람은 밥,국,김치를 먹어야 산다고 하신다. 저녁 식탁에선 민박집에서 점심을 제공하지 않는 탓에 어쩔 수 없이 먹어야만 했던 프랑스 음식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얼마전 프랑스 요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가끔 저녁 식사시간을 놓치는 분들이 있는데 대부분 인근에 위치한 맥도날드에서 정크를 맛있게 먹고 오셨다. 된장본능이 주체가 안되는 분들은 까페의 도시에서 스타벅스만을 고집했다. 여기까정 와서 왜 그런걸 먹어.
민박집 홈페이지에 '이모님께서 해주시는 맛있는 한정식...' 어쩌구 저쩌구의 문구가 박혀있는 관계로 '이모님'이 아닌, 더구나 여자도 아닌 나를 보고 실망과 의혹의 눈초리를 감추지 못하는 분들이 종종 계셨다. 그러나 올해로 자취생활 10년을 꾹꾹 눌러채운 나. 손님들은 대부분 첫 밥을 먹으며 놀랐다. 아줌마들은 남자가 차려주는 밥상은 처음 받아볼뿐더러 자기꺼보다 맛있다며 밥풀을 튀겼다. 아저씨들은 무슨 국이든 두세그릇씩 퍼드셨다. 나 자신이 술을 좋아하니 국을 잘 끓일 수밖에. 인공조미료는 손대지 않았다.
저녁식사가 끝나면 종종 술판이 벌어졌다. 와인잔이 돌았고 와인이 떨어지면 각자의 방에 짱박혀있던 팩소주 혹은 1.8리터 펫트병 소주 따위가 튀어나왔다. 설거지를 하고 있는 내게도 잔이 왔다. 총각은 요리공부하는 학생인가? 술이 돌면 주로 장기투숙객들이 대화를 주도했다. 화제는 단연 파업이었다. 마침 프랑스 전역이 연금정책개혁에 반대하는 파업으로 들끓었고 투쟁의 수위는 노동자들이 정유시설을 점거, 모든 주유소의 기름이 바닥나 '교통대란'이 벌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파리에 여행 혹은 출장을 오신 분들은 프랑스가 안그래도 평소에 푸짐하게 제공하는 비효율과 불편함을 몇갑절로 즐겨야했다.
르노삼성에서 일하는 자와 현대중공업에서 일하는 자가 프랑스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보이는 태도는 당연히 달랐는데, 르노삼성에서 일하는 자의 직급이 현대중공업에서 일하는자의 그것보다 압도적으로 높았던 탓인지 현대중공업에서 일하는 자는 자신의 견해를 힘있게 말하지 않았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 것이 아님에도. 르노삼성에서 일하는 자는 복지 때문에 프랑스가 망할 거라고 단언했다. 한국이었으면 9일이 안걸려 끝냈을 일을 9주가 걸려도 안끝내는 프랑스식 템포에 분통을 터뜨렸다.
18개월 장기출장을 온 르노삼성맨은 파리에 온지 두달이 채 안됐는데 벌써 우울증 일보직전으로 보였고 늦은 밤 소주병을 들고 내려와서 나한테 잔을 건내는 일이 잦았다. 그는 엔지니어 출신 임원이고 삼성의 모든 임원들이 그렇듯 1년계약직이다. 한국에서는 벌써 그에 대한 유언비어와 험담이 떠돈다고 했다. 아닌게 아니라 투숙객들 중 르노삼성에서 출장온 자들은 죄다 그를 슬슬 피하는 분위기였다. 말하자면 그는 침몰할 가능성이 높은 배인 것이다. 나는 그가 가여웠다. 어느날 그는 만취했고 나는 그를 안아서 침대에 눕혔다. 그의 몸은 뼈와 가죽으로 되어 있었다. 칠레 광부들이 구출된 날 아침 그는 눈물이 글썽글썽해서 내게 '뉴스봤어요?'라 물었었다.
현대중공업에서 일하는 자는 상황만 된다면 자기 아이들이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원래 한달있다가 한국에 돌아가기로 되어있었는데 회사에서 한달을 더 있으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무리를 해서라도 부인과 세딸에게 프랑스 여행을 시켜주기로 결심한 후 비행기표를 끊고 민박집에 가족이 묶을 수 있는 방을 예약했다. 그런데 회사는 한달 더 있지 말고 바로 뜨라는 지시를 또 내렸다. 그것도 한국이 아니라 바레인 현장으로 바로 가라고. 그는 비행기표 위약금을 물었을 뿐만 아니라 부인과 세딸에게 면목이 없게 되어 버렸다. 르노삼성맨은 그의 잔에 소주를 채웠고 그는 르노삼성맨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파리에서 식품박람회가 있었다. 농림수산부 공무원 한명이 체크인했다. 업무상의 착오로 같이 온 공무원들이 체크인한 호텔에 묵지 못하게 되어 민박집을 찾은 것이다. 내 친구 한명이 식품박람회 한국부스에서 통역아르바이트를 했던 관계로 비하인드 스토리들을 좀 들었다. 다른 나라의 부스에서는 홍보하고자 하는 식재료로 요리한 음식에 자국산 와인 또는 커피를 곁들여 내놓는데 한국 부스에서는 차한잔 대접할 준비조차 되어있지 않았다고 한다. 당연히 파리가 날렸고 그 친구는 하루종일 다른 나라 부스들 구경만 했다고 한다. 민박집에 묵던 공무원은 3일치 돈을 내놓고 이틀만에 체크아웃했다. 호텔에 자리가 났다며. 국민의 혈세는 그렇게 낭비되었다.
출판사 대표 한분이 장기투숙 들어왔다. 십년 전 쯤에 파리에 유학을 왔었는데 박사논문 디펜스를 하지 않았고 그걸 마무리 지으러 온 것이다. 심리학 전문 서적을 내는 출판사라고 했으며 대중용 심리학 잡지를 월간으로 낼 계획을 세우는 중이었고 그걸 편집할 디자이너를 물색해야 한다고 했다. 내게서 어딘가 어두운 그늘을 발견한 그녀는 정신상담의의 태도로 내게 말을 걸었고 부모의 이혼과 할머니의 외로운 죽음에 관한 이야기 따위가 내 주둥이에서 저절로 흘러나오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는 듯 싶더니 내가 그 잡지를 디자인하게 될 수도 있는 상황이 되었다. 현재로선 거기에 올인 중이다.
어느날 한 노부부가 체크인했다. 그들은 매일 팔짱을 끼고 거리를 걸었다. 파리는 사랑스러웠고 그들은 파리보다 더 사랑스러웠다. 르노삼성맨과 출판사대표와 나는 노부부가 떠나기 전날 밤 파티를 열어주기로 했다. 우리는 어물전에 들러 그곳에 있던 성게를 싹쓸이했고 와인가게에 들러 고급와인 다섯병을 샀으며 동네 가게에서 바게트와 유기농곡물빵, 냄새가 덜한 치즈를 몇 덩어리 샀다. 나는 수육과 샐러드를 만들었고 노부부의 남편은 예쁜 케익을 사왔다. 그날은 부인의 생일이었다. 파티는 즐거웠고 나는 변기에 앉은 채 잠들었으며 르노삼성맨이 나를 침대에 눕혔다.
12월 17일 '이모'는 떠날 때보다 훨씬 건강하고 유쾌한 모습으로 돌아오셨고 나는 두달간 면도를 하지 않은 꼬락서니로 집에 돌아왔다. 2009년 연말 서울에서 유학비자 절차를 마치고 돌아온 후 오늘로 일년이다. 많은 이들한테 도움을 받았고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을 착취했기 때문에 지금 파리에서 죽지도 병들지도 않고 잘 지내고 있다. 정말 고맙습니다. 연말마다 하는 생각이지만 다가올 일년은 지난 일년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야겠다. 모두의 다가올 일년이 그러하길 빈다. 건강합시다. 연애합시다.
몇 달 전 홀서빙할 사람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S식당을 찾아갔었다. 며칠 트레이닝을 받았으나 불어가 짧아서 고용할 수가 없다며 사장은 나를 돌려보냈었다. 그는 연거푸 소맥잔을 건네며 거듭 미안하다고 했고 정말로 미안해보였다. 꼭 다시 연락을 주겠다했고 정말 다시 연락을 해왔다. 사장은 좋은 사람이며 파리의 다른 한인업체 사장들보다 훨씬 덜 나쁜 사장이다.
그는 파리 16구, 서울로 치자면 삼청동에 해당하는 부자동네에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다. 파리 외곽의 방 두개짜리 집에서 부인,아들과 한방을 쓰고 다른 방에 민박을 치는 것으로 민박 사업을 시작한 그는 십년 후 파리 16구에 객실 아홉개짜리 고급 민박집 그리고 샹젤리제 거리에 단 하나 존재하는 한식당의 소유주가 되었다. 말하자면 그는 파리 한인사회에서 레전드에 해당하는 인물인 것이다.
민박집에서 모든 노동을 도맡아하던 조선족 아주머니께서 파리생활 5년 반 만에 처음으로 고향에 두 달 동안 다녀오시게 되었는데 내가 혹시 그 땜빵을 해줄 수 있겠냐고 사장은 물었다. 할 수 있겠다 했고 며칠 후 바로 짐싸서 민박집으로 들어갔다. 숙식이 제공된다는 말은 즉 하루종일 그곳에 붙어 있어야만 하는 일자리라는 뜻이었다. 아주머니가 떠나는 날까지 일주일 동안 나는 그녀한테 트레이닝을 받았다.
민박집에서의 하루는 이렇게 구성된다. 아침 여섯시에 일어나 아침밥 준비. 일곱시 반부터 아침밥 먹이기. 설거지 끝내고 청소와 빨래 및 장보기. 저녁 여섯시부터 저녁준비. 일곱시 반부터 저녁밥 먹이기. 설거지 끝내고 취침. 그 사이사이에 투숙객이 인근 지하철 역에 도착하면 민박집으로 데려오는 일과 체크인 체크아웃을 해야한다. 매 끼니 밥과 국과 메인디쉬 하나 그리고 밑반찬 다섯가지를 낸다. 김치가 떨어지면 김치를 담그는 일도 물론 내 몫이다. 아홉개의 객실 중 일곱개는 차있으며 투숙객들은 평균 13명 정도로 보면 되겠다. 젊은 여행객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민박집보다 투숙비가 훨씬 센 관계로 투숙객은 주로 파리에 출장오는 사람들이었다.
민박집. 그곳은 한국이었다.
두달 동안 전라도 출신의 투숙객은 단 한명이었다. 투숙객들 중엔 내게 '겪어봐서 하는 말인데 전라도 것들은 믿어선 안된다'거나 '파리에도 껌둥이들이 많네요'혹은 '쪽바리와 짱깨들만 보면 재수가 없다' 따위의 말을 건내는 분들이 종종 계셨고, 가끔 '백인들이 보기엔 우리의 피부도 그리 하얗지는 않겠죠' 혹은 '여기서 본 경상도 사람들은 죄다 인종주의자던데 그 이유는 뭘까요' 아니면 '그 짱깨들이 글을 만들어서 읽고 쓸적에 우린 동굴에서 마늘과 쑥을 먹는 곰이었죠' 따위의 대답을 하면 숙연한 분위기가 조성되곤 했다.
명품 브랜드 로고가 박힌 쇼핑백들이 쓰레기의 가장 큰 부분을 이루었다. 쇼핑여행온 2,30대의 여성들은 명품사려면 쁘렝땅 백화점이 좋냐 갤러리 라파예트가 좋냐 따위의 질문을 했고, 출장온 4,50대 남자 투숙객들은 한국식 룸싸롱은 어디에 있냐 혹은 백마를 타봐야겠는데 어느 동네 물이 제일 좋냐는 따위의 질문을 했다. 대부분의 투숙객들은 고추장, 김치, 라면을 갖고 왔으며 또 그 대부분은 체크인한 그날 밤에 라면을 끓여드셨다.
어제 밤에 파리에 온 분들, 그러니까 아직 프랑스 음식을 안 드셔본 분들이 오늘 아침을 먹으며 한국사람은 밥,국,김치를 먹어야 산다고 하신다. 저녁 식탁에선 민박집에서 점심을 제공하지 않는 탓에 어쩔 수 없이 먹어야만 했던 프랑스 음식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얼마전 프랑스 요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가끔 저녁 식사시간을 놓치는 분들이 있는데 대부분 인근에 위치한 맥도날드에서 정크를 맛있게 먹고 오셨다. 된장본능이 주체가 안되는 분들은 까페의 도시에서 스타벅스만을 고집했다. 여기까정 와서 왜 그런걸 먹어.
민박집 홈페이지에 '이모님께서 해주시는 맛있는 한정식...' 어쩌구 저쩌구의 문구가 박혀있는 관계로 '이모님'이 아닌, 더구나 여자도 아닌 나를 보고 실망과 의혹의 눈초리를 감추지 못하는 분들이 종종 계셨다. 그러나 올해로 자취생활 10년을 꾹꾹 눌러채운 나. 손님들은 대부분 첫 밥을 먹으며 놀랐다. 아줌마들은 남자가 차려주는 밥상은 처음 받아볼뿐더러 자기꺼보다 맛있다며 밥풀을 튀겼다. 아저씨들은 무슨 국이든 두세그릇씩 퍼드셨다. 나 자신이 술을 좋아하니 국을 잘 끓일 수밖에. 인공조미료는 손대지 않았다.
저녁식사가 끝나면 종종 술판이 벌어졌다. 와인잔이 돌았고 와인이 떨어지면 각자의 방에 짱박혀있던 팩소주 혹은 1.8리터 펫트병 소주 따위가 튀어나왔다. 설거지를 하고 있는 내게도 잔이 왔다. 총각은 요리공부하는 학생인가? 술이 돌면 주로 장기투숙객들이 대화를 주도했다. 화제는 단연 파업이었다. 마침 프랑스 전역이 연금정책개혁에 반대하는 파업으로 들끓었고 투쟁의 수위는 노동자들이 정유시설을 점거, 모든 주유소의 기름이 바닥나 '교통대란'이 벌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파리에 여행 혹은 출장을 오신 분들은 프랑스가 안그래도 평소에 푸짐하게 제공하는 비효율과 불편함을 몇갑절로 즐겨야했다.
르노삼성에서 일하는 자와 현대중공업에서 일하는 자가 프랑스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보이는 태도는 당연히 달랐는데, 르노삼성에서 일하는 자의 직급이 현대중공업에서 일하는자의 그것보다 압도적으로 높았던 탓인지 현대중공업에서 일하는 자는 자신의 견해를 힘있게 말하지 않았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 것이 아님에도. 르노삼성에서 일하는 자는 복지 때문에 프랑스가 망할 거라고 단언했다. 한국이었으면 9일이 안걸려 끝냈을 일을 9주가 걸려도 안끝내는 프랑스식 템포에 분통을 터뜨렸다.
18개월 장기출장을 온 르노삼성맨은 파리에 온지 두달이 채 안됐는데 벌써 우울증 일보직전으로 보였고 늦은 밤 소주병을 들고 내려와서 나한테 잔을 건내는 일이 잦았다. 그는 엔지니어 출신 임원이고 삼성의 모든 임원들이 그렇듯 1년계약직이다. 한국에서는 벌써 그에 대한 유언비어와 험담이 떠돈다고 했다. 아닌게 아니라 투숙객들 중 르노삼성에서 출장온 자들은 죄다 그를 슬슬 피하는 분위기였다. 말하자면 그는 침몰할 가능성이 높은 배인 것이다. 나는 그가 가여웠다. 어느날 그는 만취했고 나는 그를 안아서 침대에 눕혔다. 그의 몸은 뼈와 가죽으로 되어 있었다. 칠레 광부들이 구출된 날 아침 그는 눈물이 글썽글썽해서 내게 '뉴스봤어요?'라 물었었다.
현대중공업에서 일하는 자는 상황만 된다면 자기 아이들이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원래 한달있다가 한국에 돌아가기로 되어있었는데 회사에서 한달을 더 있으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무리를 해서라도 부인과 세딸에게 프랑스 여행을 시켜주기로 결심한 후 비행기표를 끊고 민박집에 가족이 묶을 수 있는 방을 예약했다. 그런데 회사는 한달 더 있지 말고 바로 뜨라는 지시를 또 내렸다. 그것도 한국이 아니라 바레인 현장으로 바로 가라고. 그는 비행기표 위약금을 물었을 뿐만 아니라 부인과 세딸에게 면목이 없게 되어 버렸다. 르노삼성맨은 그의 잔에 소주를 채웠고 그는 르노삼성맨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파리에서 식품박람회가 있었다. 농림수산부 공무원 한명이 체크인했다. 업무상의 착오로 같이 온 공무원들이 체크인한 호텔에 묵지 못하게 되어 민박집을 찾은 것이다. 내 친구 한명이 식품박람회 한국부스에서 통역아르바이트를 했던 관계로 비하인드 스토리들을 좀 들었다. 다른 나라의 부스에서는 홍보하고자 하는 식재료로 요리한 음식에 자국산 와인 또는 커피를 곁들여 내놓는데 한국 부스에서는 차한잔 대접할 준비조차 되어있지 않았다고 한다. 당연히 파리가 날렸고 그 친구는 하루종일 다른 나라 부스들 구경만 했다고 한다. 민박집에 묵던 공무원은 3일치 돈을 내놓고 이틀만에 체크아웃했다. 호텔에 자리가 났다며. 국민의 혈세는 그렇게 낭비되었다.
출판사 대표 한분이 장기투숙 들어왔다. 십년 전 쯤에 파리에 유학을 왔었는데 박사논문 디펜스를 하지 않았고 그걸 마무리 지으러 온 것이다. 심리학 전문 서적을 내는 출판사라고 했으며 대중용 심리학 잡지를 월간으로 낼 계획을 세우는 중이었고 그걸 편집할 디자이너를 물색해야 한다고 했다. 내게서 어딘가 어두운 그늘을 발견한 그녀는 정신상담의의 태도로 내게 말을 걸었고 부모의 이혼과 할머니의 외로운 죽음에 관한 이야기 따위가 내 주둥이에서 저절로 흘러나오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는 듯 싶더니 내가 그 잡지를 디자인하게 될 수도 있는 상황이 되었다. 현재로선 거기에 올인 중이다.
어느날 한 노부부가 체크인했다. 그들은 매일 팔짱을 끼고 거리를 걸었다. 파리는 사랑스러웠고 그들은 파리보다 더 사랑스러웠다. 르노삼성맨과 출판사대표와 나는 노부부가 떠나기 전날 밤 파티를 열어주기로 했다. 우리는 어물전에 들러 그곳에 있던 성게를 싹쓸이했고 와인가게에 들러 고급와인 다섯병을 샀으며 동네 가게에서 바게트와 유기농곡물빵, 냄새가 덜한 치즈를 몇 덩어리 샀다. 나는 수육과 샐러드를 만들었고 노부부의 남편은 예쁜 케익을 사왔다. 그날은 부인의 생일이었다. 파티는 즐거웠고 나는 변기에 앉은 채 잠들었으며 르노삼성맨이 나를 침대에 눕혔다.
12월 17일 '이모'는 떠날 때보다 훨씬 건강하고 유쾌한 모습으로 돌아오셨고 나는 두달간 면도를 하지 않은 꼬락서니로 집에 돌아왔다. 2009년 연말 서울에서 유학비자 절차를 마치고 돌아온 후 오늘로 일년이다. 많은 이들한테 도움을 받았고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을 착취했기 때문에 지금 파리에서 죽지도 병들지도 않고 잘 지내고 있다. 정말 고맙습니다. 연말마다 하는 생각이지만 다가올 일년은 지난 일년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야겠다. 모두의 다가올 일년이 그러하길 빈다. 건강합시다. 연애합시다.


